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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복지재단 이 시대의 선한 사마리아인 '신희숙 위고봉사단'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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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엔 잔치국수, 겨울엔 김치…50년 묵묵히 나눔 실천한 '대구 할머니' (조선일보 2024.08.20)

 

'대구 할머니'로 불리는 신희숙(63)씨가 어르신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이랜드복지재단

 

큰 돈을 기부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선행을 꾸준히 실천하는 이들도 있다. 후자는 한 번의 큰 선행보단 주목 받지 못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평생 어려운 이들을 챙기며 살아온 대구 할머니는 이웃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소그미(소금)’가 됐다.

 

신희숙(63)씨는 나누는 삶을 강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52년 동안 선행을 이어왔다. 학창 시절 수돗가에서 서성이며 배고픔을 호소하던 친구들에게 매주 고구마와 감자를 나눠주던 게 시작이었다. 고교 시절 국립목포병원, 한산촌(결핵 요양원), 소록도 섬마을 의료 봉사 및 교도소 봉사 등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봉사자의 삶을 살게 됐다.

 

남편을 따라 대구로 와서는 교회 지인들과 주먹밥을 만들어 인근 노점상 상인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무료 급식 봉사활동은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서 미숫가루와 잔치국수를 전하고, 겨울에는 갓 지은 밥과 김치를 나누는 일로 이어졌다. 비가 오면 물이 차오르는 집에 가서 함께 물을 퍼내기도 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삶에 보람을 느꼈다.

 

신씨는 아버지의 영향이 정말 크다아버지가 지나가던 사람이 있으면 꼭 물 한 잔이라도 마시고 가게 하시던 모습이 제 삶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고 했다.

 

그때 한이 맺혀서신씨의 마음, 결혼이주여성에게 향하다

 

'대구 할머니'로 불리는 신희숙(63)씨가 아동에게 받은 그림 편지. /이랜드복지재단

신씨의 나눔은 주변 어르신에서 결혼이주여성, 다문화가정의 아이들로 번졌다. 1989년 미군 부대 인근으로 이사했을 때 겪었던 일이 계기가 됐다.

 

신씨는 강가에서 배를 만지며 복통을 호소하며 울고 있던 한 외국인 여성을 봤다. 이 여성은 한국말을 하지 못해서 신씨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굶주림을 호소하는 것 같아서 빵과 우유를 사준 뒤 삐삐 번호를 알려주었지만, 끝내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나중에야 그 여성이 준비되지 않은 임신 및 유산으로 길거리에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신씨는 그 여성을 당장 병원에 데려가지 못한 게 마음의 한으로 남았고, 다문화가정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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